<LUMI KUKE_salt to taste> - 김수진 미술평론가
<LUMI KUKE_salt to taste>, 지훈 스타크 展 | 2022.04.21~05.28 | 갤러리SP
“kitchen painting” 일상과 예술적 사유의 교차점
김수진 미술평론가
“입맛에 맞게 작품을 음미하세요.”
지훈 스타크(Jee Hoon Stark)는 이렇듯 관객을 향해 정감이 담긴 메시지를 건넨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에 제시했던 광범위한 주제보다는 경험을 통한 구체적인 감성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이슈 같은 거대한 담론을 다루기보다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 얻은 자유로운 에너지와 사유의 단상을 화면에 펼쳐낸다. 작가는 어릴 적에 한국을 떠나 아이오와(State of Iowa)라는 도시에 정착해 살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일상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야기의 중심에 ‘부엌’이라는 장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 “LUMI KUKE”는 하와이어로 ‘부엌(키친)’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지닌 상징성이 그리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엌이라는 장소는 작가의 일상의 결이 투영된 지층인 동시에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객들에게 건네는 작가의 메시지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그가 말하는 ‘음미(吟味)’란 먼저 혀끝에서 느껴지는 미감에 대한 것이겠고, 다른 차원으로는 ‘사물(事物)’, 다시 말해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사유(思惟)일 것이다. 이 같은 ‘사사로운 일들’이 교차하는 작가의 경험적 시간이 “kitchen painting”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로컬리티(locality)의 영향과 건축적인 드로잉
지훈 스타크는 열세 살에 한국을 떠나 아이오와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체험하였고 그 영향을 온전히 투영하여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후로 예컨대 네이티브 아메리칸 건축문화의 관심 같은 건축적인 사유를 주제로 드로잉과 페인팅을 시작했다. 건축이라는 화두가 지훈 스타크 작업의 원천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지도교수와 동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건축 프로그램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 경험을 토대로 회화를 기반으로 한 ‘건축적인 드로잉’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작가는 뉴욕, 호놀룰루, 도쿄, 뮌헨 등지를 여행하며 작업하였다. 그는 건축과 그림의 경계에서 이 둘을 분리하여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무계획적인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건축에서는 무엇보다 수적으로 철저한 계획이나 설계도가 중요한 반면에, 그림은 이와는 전혀 다른 과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자 간의 프로세스를 융합하여 전방위적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펼쳐내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훈 스타크가 거주했던 뉴욕의 작업실 옆에는 유명한 건축학교가 있었는데, 여름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자신들이 만든 무대나 구조물을 내다 버리고 갔다고 한다. 학생들이 남기고 간 이 ‘흔적’들은 작가에게 엄청난 ‘재료 공장’이 되어 돌아왔고, 작가는 거대한 재료 더미에서 물질에 대한 단상을 끌어낼 수 있었다. 어떠한 이유나 계획 없이 재료를 가져다 부수거나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물질이 제거되고 남겨진 자리는 때때로 멋진 차원의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벽과 구조만 남은 흔적들 위에 작가만의 조형을 세워서 건축적인 공간을 구현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이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입체적 구성이나 재료적 실험들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2016년에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흙’이라는 물질의 원초성에 대한 탐문과 2018년에 우연히 접하게 된 낡은 한옥의 목재를 통한 재료적 실험들은 그에게 작업과정 자체에 대한 존중과 물질에 내재한 ‘사건성’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건축적인 경험과 재료적 측면이 작업에서 중요하게 위치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캔버스 화면에 최종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물감의 마티에르나 미세한 붓터치를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평면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입체적인 조형 요소들은 화면 안에서 활발하게 서로 작용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화면은 극도로 평면적이며 매끈한 무광택의 정돈된 캔버스이다. 특히 매트한 평면을 가능케 한 제1의 재료는 제소(gesso)다. 작가에 따르면, 제소로 처리한 매트한 무광의 흰 캔버스 위에 연필과 왁스 펜슬로 자유롭게 그리는 느낌에서 좋은 영감을 떠올린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캔버스가 아닌 ‘캔버스 라이크’ 텍스처를 지닌 종이에 그림을 그렸고 반드시 액자를 끼워야만 작업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적 사유와 그림의 경계가 그려낸 풍경
이 같은 양면성을 지닌 그의 회화에서 무엇보다 주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아마도 화면 안에 담긴 이야기라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작가의 일상과 관계 맺고 있는 경험적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A TOY CITY series》에서 발표했던 작품과 비교해 화면에 그려진 도상은 간결한 ‘선’으로 전환되었고, 그 간결함 속에 작가의 기억과 이야기의 결들은 한층 풍부해졌다. 선적인 조형 요소들은 ‘그리드(grid)’를 통해 면으로 상징화되어 표현되고 건축의 설계도를 연상시키는 도상들이 캔버스 곳곳에 자리해 있다. 또한 건축에 사용되는 다양한 도구들이 엄격한 수치적 계산과는 거리가 먼 비율로 그려져서 마치 소꿉놀이에 등장하는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가는 캔버스 화면에 창문을 그려 뷰(view)를 확보하는가 하면 어떤 일정한 구역을 설정하여 땅인 것처럼 짐작되도록 드로잉하였다.
그리드는 부엌 바닥에 표현된 것을 비롯해 모든 작품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예컨대 그리드 위에 변기형상을 그려 넣어서 어느 지역에선가 소시지 냄새가 났던 화장실에 대한 작가의 사사로운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에게 일명 ‘화장실 프로젝트’는 온전하게 ‘홀로 됨’을 즐기는 자신만의 사유를 담아낸 것으로 이해되는데, 아보카도를 반으로 자른 단면과 변기형상이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며 화면에 자유롭게 유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지훈 스타크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주방용품과 공간들이 실제 자신의 부엌 속 모습이며 식재료를 섞는 과정은 물감을 섞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은 캔버스 화면에 부엌, 쿠킹, 도구들 같은 다양한 구성과 어우러져 “kitchen painting”으로 의미화된다. 요리를 통한 자신의 흥미로운 경험들이 영감의 원천이 되어 화면에 새로운 차원의 조형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지훈 스타크가 건축에서 얻은 영감 못지않게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언어로 소통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림과 건축적 조형 사이에서 얻게 된 경험들은 작가의 언어적 사유와 맞물리면서 계획되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화면에 전개된다. 작가의 언급처럼 그림의 구상 단계에서 시각적, 미각적, 공간적 감각을 구체적인 형태로 가시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러한 공감각적인 요소가 2차원 평면 안에서 구체화되기 위해서 언어는 필수적인 매개체가 될 것이다. LUMI KUKE, LUMI KUKE 등등 캔버스 화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생소한 어구가 일종의 언어적 유희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부엌을 뜻하는 단어인 ‘LUMI KUKE’는 그림 안에서 마치 대체 불가능한 대표적인 도상의 자격을 부여받은 듯하다. 작가의 일상 이야기가 일종의 워드 플레이(word play)를 통해 결합하여 독특한 조형성을 드러내 준다. 이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검은색 바탕에 ‘원두커피’ 머신을 그려 넣고 그 옆에 나란히 ‘원두막’이라고 쓴 것처럼 작가의 자유로운 동어반복적 언어유희가 흥미롭다. 추상적으로 상징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 같은 언어적 도상들은 진솔함과 유머가 담긴 구체성을 띤 추상성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지훈 스타크는 일상과 예술이라는 ‘감성적 음미’가 이루어지는 일명 “kitchen painting”을 통해서 소통하고자 한다. 작가의 일상은 의도치 않은 유희적인 언어와 추상화된 도상들과 경쟁하지 않으며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이들은 건축과 그림의 경계에서 시간성이라는 단단한 층위를 이루며 예술적인 풍경으로 살아나고 있다.